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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sorteD

hypertexT, informatioN, anD somE

뭔가 쓰고싶은 주제가 두 개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하나를 어느샌가 잊어버렸다. 나머지 기억하고 있는게 제목과 같은 것이었는데
링크를 겨우 찾아서 붙여 본다.


오마이에서 이런 깊이 있는 글을 만날줄은 미처 몰랐는데,
저자는 상당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나도 겪고 있는 문제겠지만, 정보를 지식으로 착각하는 문제,
그것은 꽤 심각한 일이다. 비단 연구를 업으로 삼는 우리 뿐만 아니라
일반인이라도 그러하다.

(전략)

종이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믿기 어려울지 모르나, 책은 더 발전하기 어려울 만큼 궁극적 형태에 도달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보존성, 사용과 휴대 편이성, 가격 등 모든 면에서 말이다. 책의 형태가 수세기 동안 거의 변함없이 유지되었다는 사실이 이 점을 말해준다.

(중략)

그러나 '꼭 필요한 정보'만으로 무장할 때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이 지식은 넓되 무척 얇기 때문이다. 과거에 지식은 언제나 깊이와 함께 왔다. 필요한 정보만 골라낼 수 없는 종이책의 특성으로 인해, 독서는 상당한 시간투자와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특정 주제를 체계적이고 일관되게 발전시켜 가는 책 내용을 끝까지 따라가기 위해서는 깊은 사고와 인내가 필요하다.

 지식이 존경 받아온 이유는 이렇게 어렵게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의 '지식'은 훨씬 빨리, 쉽게, 많이 온다. 그리고 훨씬 더 얇게. 사람들은 검색으로 긁어온 단편적인 정보의 조각들을 '박식'으로 착각하곤 한다('얇다'는 뜻의 '박식'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금박처럼 얇은 정보의 조각들은 질문 몇 개로 쉽게 밑천을 드러낸다.

(중략)

인터넷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환호했다. 지리적 거리나 현실적 조건을 건너뛰어 동등한 조건에서 교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터넷은 다른 견해를 교환하며 시각을 넓히는 교류의 장보다는, 시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기존의 신념을 강화하는 '발칸화'의 온상으로 기능하고 있다. 내 생각과 다른 이들에게는 무시와 모욕(또는 '언팔'과 '블록')이 준비되어 있다.

 토론의 공간으로서 인터넷이 갖는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처음 품었던 기대를 접어가고 있다.



사실 나는 여전히 이 세상에 적응해 있는,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인터넷이 제공할 수 있는 얇은 지식에 내 기억력을 낭비하지 않으려고 한다.
말 그대로 찾으면 되니까. 이 부분에서 교수님과 자주 충돌이 있지만,
나는 아직은 이 관점을 접을 생각이 없다. 아직 희망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상황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난독과 개념 결합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이제 모두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이 된 것 같다.
사람들은 점점 단문에 익숙해지고, 호흡이 짧아진다.
이 반대급부로 슬로우 라이프, 슬로우 푸드, 등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지 싶다.
이러한 현상에 분명히 하이퍼텍스트와 각종 소셜 서비스들이 일조했음은 분명하다.

(전략)

종이책의 구성은 수세기를 거치며 체계화되었다. 문장은 논리적으로 결합되어 문단을 구성하고, 문단은 서론, 본론, 결론의 형태로 완결된 구조를 갖는다. 추가 정보는 주석으로 처리해 흐름이 끊기지 않게 한다. 글은 왼쪽이나 오른쪽 어느 한 방향에서 시작해 반대편에서 마무리되는 방향성 또는 선형성(linearity)을 갖는다.

하이퍼텍스트는 이런 선형성을 파괴한다. 문장을 다 읽기도 전에 링크를 클릭해 다른 기사로 넘어가기도 하고, 논의의 맥락을 소화하기도 전에 엉뚱한 자료를 뒤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 일쑤다. 선형텍스트와 하이퍼텍스트가 집중과 이해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많은 논문이 나와 있다. 이 가운데 다수가 하이퍼텍스트가 정보의 이해와 기억에 끼치는 부정적 측면을 지적한다.

예컨대 타미 맥도넬(Tommy McDonell)은 2006년 연구에서 동일한 정보를 하이퍼텍스트와 선형텍스트로 만들어 비교실험을 했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일부는 하이퍼텍스트를 모바일 기기로 읽게 하고, 다른 집단에게는 종이 인쇄물을 나누어 주었다. 맥도넬은 이 두 실험군 사이에 현저한 차이를 발견한다. 하이퍼텍스트를 읽은 학생들은 인쇄물을 읽은 학생들에 비해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읽은 내용을 잘 기억하지도 못했다.

(후략)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04824


뭐 링크가 하나는 자동으로 걸리고 하나는 수동이라 좀 거시기하지만

두 개의 기사의 개념을 연결하는게 나도 쉽지는 않다.
뭐, 결론을 내자면
정보를 모으는게 목적이 아니고, 지식에 깊이를 더하는데 필요한 수단임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예전부터 내가 주장하던 것이지만, 지식이 어떠한 '지성'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그보다 한 차원쯤 더 높은 단계이다.

신인류가 하이퍼텍스트와 단문을 이용해서 깊이있는 지식을 획득할 수 없다고
단언하기는 이르다. 그들은 진화해서 그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결과들과, 내가 가지고 있는 느낌들을 고려하면
그것은 진화가 아니라 퇴화가 될 가능성이 더 큰 것처럼 보인다.
'소셜'은 단언컨대 허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생산자인 시대, 라고 쉽게 말하지만
실제 뭔가를 생산해 내는 사람은 여전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소셜은 뭔가를 공유할 뿐이지 생산하지는 못하더라.
그것은 그렇다면 시간을 죽이는 것과 무엇이 다른것이 있나?
게임은 적어도 스토리를 생산해 낸다. (이인화 교수의 지론. MMORPG의 경우.)
따라서 그 신인류가 진화한 어떤 형태가 되려면, 뭔가 다른 형태의 패러다임이 등장해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나는 그 패러다임이 어떤 식일지 짐작할 수가 없다.
나타나면 알아볼 수 있을까. 사실 SNS도 어떠한 대안처럼, 패러다임처럼 나타났지만 결국은 유행이었던 것처럼.
어쨌거나 뭔가 오기는 올 거다. 변화의 조수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그리 멀지 않은 때에.
지식이 제 가치를 인정받게 되겠지.